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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y&Comics

먼 북쪽

"저들은 우리와 다릅니다. 땅 한 뼘을 내주면 한 평을 가져갑니다. 우리가 땀을 흘려 모아놓은 먹거리를 내주면 등 뒤에서 바보들이라며 비웃을 뿐입니다. 예, 저자들도 보답이야 하겠죠. 여러분들은 제 아버지와 똑같은 선물을 받게 될 겁니다. 바로 사방 2미터짜리 무덤 말입니다."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세계의 소련에서 혼자 살고 있는 메이크피스는 얼어 죽더라도 책을 불태우는 게 제일 싫은 사람이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책을 불태우려 하는 걸 발견하고 총으로 쏘았지만, 곧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고 자책감에 집으로 데려간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상당히 어렸던 데다 그가 가지고 있던 무기라곤 녹슬어빠진 칼밖에 없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임신하고 있었다.

 

 주인공이 세상 험한 일 다 겪은 지혜로운 여성인지라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데 상당히 경계를 한다. (얼마나 조심했으면 빌 에반스가 죽은 이야기는 쏙 빠졌을까... 랄까 작가님 소설 써가다가 중도에 설정 빼먹은 건 아니죠? 그렇다고 말해줘?!) 회상 장면은 공간도 시간 개념도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에 소설 내용을 잘 읽으려면 머리를 많이 굴려야 한다. 일단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 사는데 눈치 빠른 사람이 아니라면 대체 주인공이 뭔 소릴 하는지 하나도 모를테니 읽지 말길 추천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사람들이 자신을 비꼬는 말을 하고 있는지, 액면 그대로 말하고 있는지 심중을 파악하는 훈련은 아주 잘 된다. 이 소설에서는 유달리 "저 새끼는 도대체 어떻게 저 판국에서 살아남은 거야?" 라고 말할 만한 사람이 전무하다. 다시 고쳐 말하자면, 전부 죽인다. 내가 디스토피아 소설 정말 좋아하긴 하는데, 정말 이 소설은 주인공 너무 빡세게 굴린다. 얼굴에 염산 끼얹고 애를 두 번이나 사산시키는데 하물며 친구까지 없어...

 

 

나는 굉장한 사람이고, 생존력이 높아. 그런 사람들은 물론 어디에나 있다며 말하고 있지만 은근 자신이 힘센 남자들 패거리에 끼어있다고 자랑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누군가가 이런 특이한 나를 발견하고 데려가주길 바란다는 건 희망이 아니라 어찌보면 자만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단지 신데렐라 콤플렉스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주인공은 포기했을 수 있다. 일단 고향집에 돌아가지만 마을은 커녕 가정도 만들지 못했고 말이다. 그렇게 힘들게 사회에 편승하려 노력했는데 할머니가 되도록 늙었는데도 이웃 간 최소한의 물물교환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아무튼 소설이 다 끝날 때까지 메이크피스는 아직도 소련 땅 내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사실 메이크피스의 결정적인 실수는 쓸데없는 희망을 품기 이전의 문제이다. 평생 그녀는 종교를 맹신하는 아버지가 선한가 악한가에 너무 집착했다. 사드라던가 하는 민감한 사안이 세상의 이슈가 될 때는 그에 대한 많은 의견을 들어봐야 하고, 최소한 찬성과 반대 둘 다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책을 읽어봤자 머리만 아프다'라고 한다. 대부분의 술자리에서는 핵발전소라던가 정치 의견같은 주제가 금물인데, 그걸 금물이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 머릿속엔 분명 99.9% 맹신적으로 믿는 어떤 사상이 있다. 결국 메이크피스는 죽는 날까지 책을 땔감으로 쓰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 소설의 처음부터 그녀가 책을 읽는 장면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걸 명심하자.

 결론을 내리자면 나는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 방사능과 탄저균이 마구 뒤섞인 디스토피아는 좀 억지가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둘 다 현실에 존재하는 무기인지라 지적할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요즘 판타지 소설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잔인한 설정을 마음껏 보여주었다. 이 책을 아주 좋아한다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역시 예상대로 변태였나. (?) 또한 여자는 무기를 만든들, 힘이 센들, 숫자가 많아진들 결코 남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설정도 마음에 들었다. 요즘 페미니즘 한번 유행한다고 남자들의 세상이 전복될 것처럼 떠들썩한데,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과격분자들을 찾아가(어쩌면 그들이 지속적으로 협박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자신의 집안에 소동을 일으켜달라고 부탁했던 메이크피스의 아버지처럼, 오히려 함정의 느낌이 다분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던 세상에 문자와 책이 없어지면 머리보다는 근육이 좋은 사람이 유리하다. 얼마나 간단한가. 전쟁이 일어나면 남성들이 여자를 지키고(혹은 약탈하고) 힘을 마음껏 과시할 수 있다. 본능으로 힘내보시라. 나는 세상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힘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해야할 일 다 잊어버리고 책에 푹 빠진 건 정말로 오랜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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