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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r

꼼짝도 못하고 서있기

쇼핑카에 콘돔을 담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잠시 후, 쉰다섯 살인 매형과 함께 통로를 지나가면서, 크게 과시하며 다니는 동성애자 커플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
"다른 것도 넣어야지, 안 되겠어요."
매형은 농산물 코너로 자취를 감췄다가 조금 뒤에 딸기 1.8킬로그램 한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딸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동성애자로 보였다. 이제 우리 머리 위에는 만화 말풍선이 떠 있었다. '우리는 항문 성교를 한 뒤에 쇼트케이크를 즐겨 먹어요!'
내가 말했다.
"다른 거, 다른 게 꼭 필요해요."
매형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참 생각했다.
"올리브유가 필요하긴 해."
내가 딱딱거렸다.
"안 돼요. 그냥 계산하고 나가요. 제발, 얼른."
(...)
나는 청소년 독자에게 말하곤 했다.
"줄 게 있어요. 별것 아니고, 감사의 뜻으로 아주 작은 걸 준비했어요."

 

 

 

생각해보니 나는 남의 일기를 보는 걸 좋아하는 취향이 아주 어릴 적부터 있었다. 반면 내가 일기를 쓰는 건 취향에 아주 맞지 않았는데, 초등학교 때 매일같이 열심히 내가 쓴 일기를 매일같이 검사했던 선생님은 이 말을 들으면 의외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는 일기를 누군가가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열심히 썼던 듯하다.

 

 아무튼 내가 쓴 일기를 내가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남의 일기를 들여다볼지언정 절대 일기를 쓸 마음은 없다. 적어도 인터넷에다가 무엇인가를 쓰면 누군가 보지 않겠는가. 애초에 종이 위에 자신만의 입장을 잔뜩 적어놓고 시간이 지난 뒤 들여다보는 건 악취미라고 생각한다. 그런 실용적이지 못한 일을 하는 건 죄악이라고 단호하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장 일기를 잘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다. 그도 예수 그리스도에 버금가는 위인이지만 어차피 인간인지라, 원균의 입이 딱 벌어지는 멍청함에 뚜껑이 열려서 자신만의 입장을 길게 쓴 적은 있다. 하지만 태반은 선박을 지었는데 예산이 얼마가 들었고, 그 일에 매달린 백성들은 몇 명이었고, 군량미는 얼마가 들었다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들이어야 대게 다시 내가 쓴 일기를 들여다볼 때 만족스러울 수 있다.

 

 

 

 이 에세이는 파격적인 유머가 담겨져 있다. 물론 유명한 코미디언들이 늘 그렇듯 애써 밝아지려 노력하는 측면도 있다.

 

 가족에 대한 애증과 회의주의적인 시선도 그렇지만,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는 오바마의 연설을 좋아하지만 당선 이전에 동성애자에 대해 지지하지 않는 데 대한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그러면서도 오바마를 지지하지 않는 미국 사람들의 광란을 액면 그대로 써낸다. 그의 글로 볼 때면 이번의 트럼프 당선은 미국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작가는 명확히 자신의 일기와 공적인 글은 다르다고 선을 긋고 있지만, 대체로 수위가 높은 이야기들을 적절하게 풀어냈다. 그의 솔직함이 좋은 인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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