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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시인의 사물들

집중된 밤의 독서를 통해 저는, 판타지 소설 속의 주인공이 갑자기 어떤 시공간에 내던져지듯이, 시공을 초월한 어딘가로, 누군가의 광막한 마음속으로 들어가곤 합니다. 타인의 마음을 마치 온전히 자신의 것인 양 느끼게 되었을 때의 정신적 일체감은 역설적으로 완벽한 육체적 고독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 세상에 1인 가구는 많아졌는데 오랫동안 불을 키고 있는 가구 또한 많아진 듯하다. 여러모로 고독한 미식가가 생각나는 구절이다.

 

유달리 강원도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되는데 나만 그런가. 특히 원주라거나 속초라거나 설악산이라던가가 툭툭 튀어나와서 나를 움찔거리게 했다. 물론 당신의 사물들이란 책에서도 나오긴 했지만 유독 이 책이 그랬던 이유는 아무래도 이 책이 훨씬 일상물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일상물 애니메이션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라거나 목숨 걸 멜로물이 별로 등장하지 않고 단지 잔잔한 개그라던가 훈훈한 덕담이 흘러가는 장르이다. 그러고보니 강원도 분위기이기도 하다. (즉슨 국뽕물도 섞여있다는 이야기이니 주의를 요한다.) 요새는 개발로 인해 점점 회색빛으로 물들고 있고 불안한 분위기로 기울고 있긴 하지만.

 

술에 대한 이야기도 당신의 사물들보단 비중이 훨씬 없다. 뭐 예닐곱 살 때 술심부름하면서 막걸리를 훔쳐 마셨다는 굉장한 기록도 있긴 하지만 딱 그것뿐이다. 당신의 사물들보다 격한 인생이 나오지 않아서 재미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맥이 빠지긴 하다. 솔직히 시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채 시인의 사물들이 더 격할 줄 알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사물들 자체에 더욱 집중해서 탐구한 듯한 기색은 있다. 남의 인생역정을 각인시키게 되는 일 없이 덤덤하게 책을 읽고 싶은데 당신의 사물들과 시인의 사물들 중 굳이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난 후자를 추천하고 싶다. 내 마음에 드는 건 막장드라마에 가까운 전자이지만.

함성호의 치마라는 글은 사람을 여러모로 놀래킨다. 일단 강원도 속초 출신인데도 이렇게 자유로운 글을 쓰신다는 게 그 첫째이다. (아무래도 지금은 다른 데서 살고 계신게 아닐까 싶고 그게 아니라면 더더욱 위대하신 듯하다.) 그것도 그런데 글은 또 무지하게 80년대 꼰대답다는 게 그 두번째다. 연애금지 법칙은 대체 뭔가욬ㅋㅋㅋㅋ 그러고보면 우리나라 페미니즘은 아직도 치마 입고 다니는 여자들을 좀 눈꼴시리게 보는 게 있는 듯하다. 지금부터라도 이들이 술 마시고 담배 피는 남성들을 따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애하면서도 치마도 원피스도 자연스레 입고 왕언니 혹은 여장부로 살았으면 한다. 근데 앞의 문장을 쓰고 생각해보니 촌나 힘든 일이네 그거 ㅋㅋㅋㅋ 상상만 해도 천개의 고원 보는 줄.

바흐친과 같이 니체도 대부분의 경우 시인을 맹렬하게 공격하던데, 형식에 굴복하기 쉬운 시인들의 자세 자체를 공격하려던게 아닌가 싶다. 아닌게 아니라 김수영 시인의 시 전집을 읽어봤을 때 그의 시는 마치 일기처럼 전개되어 있었다. 그 시를 지었던 연월일이 적혀있었던 걸 보면 다소 시에 변덕성이 드러난다고 알려져 있던 실비아 플라스도 마찬가지였던 걸로 알고 있다. 이 사실은 마치 그들의 인생에 굴곡이 없었더라면 그들의 시도 평범했을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런 비교를 하는 자체가 참 뭣하긴 한데, 박근혜 정권이 성립되었을 때 시인들은 그 당시 정권을 많이 걱정하는 반명 소설가들은 오히려 현재 정권이 그 전의 정권보다 막나가지 않음(?)을 아쉬워했던 측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들 자체를 공격하고 싶지는 않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을테니. 단지 소설가보다는 시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일상에 가깝다는 나의 주관적 의견이 점점 사실이 아닐까 생각된다는 것이다. 일상이라고 해서 또 뭔가 오해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일상의 의미는 뭐랄까 단조로움이랄까.

 

그러다 우연히 대학로에 있던 한 레코드점에서 음반 하나를 손에 넣게 되었어. 시디를 사기에는 돈이 부족해서 늘 카세트테이프만 사던 시절이었지. 음악만이 유일한 위로였던 시절. BLUE라는 이름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었어. 이런 영화가 있었나? 순정만화의 주인공 같은 미소년이 재킷에 실린 음반이라니. 나중에야 그게 동명의 '만화' 콘셉트 앨범이라는 걸 알았지.

 

 

 

박상수 시인의 카세트테이프. 그나저나 정말 유투브엔 뭐든지 있구나...
근데 뭐라고요??? 아니 2016년에 블루가 완결되었다고??????(충격)

 

 

양팔 저울의 한쪽 접시에 나를 올려놓고, 다른 쪽 접시에 무엇인가를 올려놓는 버릇이 있다. 눈금이 똑바로 0점에 이르려면, 그때그때 올려놔야 할 품목들이 다르다. 무지개 백서른아홉 개가 필요할 때가 있고, 어둠 삼천 마지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 설악산만 한 것이 올라가도 이쪽이 안 올라갈 때가 있고, 이슬 한 방울로도 가뿐히 올라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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