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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r

나는 짧은 치마를 입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성 피해자의 경우는 어떨까요. 네. 투명인간이 되어버립니다. 애초에 남성의 성 경험을 자랑이자 '남자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남성에게 '괜찮아. 너는 순결해!'라는 말은 '와. 좋은 경험 했겠다!'로 탈바꿔 들립니다. 그렇다면 남성에게 피해를 입은 남성 피해자는? '남성에게 따먹힌 모질이, 등신'으로, 소위 말하는 '남성성'을 잃은 존재로 취급받습니다.

 

 

 

 

사실 책은 오락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힘든 삶을 살아보지도 못했고, 섬세한 성격을 지닌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자신이 최악이었던 그 날 무슨 책을 읽었는지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책장을 넘겨도 글자는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고, 되뇌고 또 되뇌어도 자꾸 내가 당했던 일이 생각나서 결국 다시 읽지 않는 이상 책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자는 아버지를 떠나보냈던 때 만화 삼국지를 읽어보려 노력했다고 한다. 때로 책은 망각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반영하기도 하고, 독자의 추억에 강하게 연결되기도 한다.

 

 재혼 가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나온다. 아버지 쪽의 자녀는 보통 어머니 쪽의 자녀보다 더 직위가 높은 취급을 받는 듯하다. 자녀의 성별이 무엇인지에 따라서도 다르겠지만, 보통 재혼할 땐 결혼적령기가 지나간 여성 쪽이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형(아버지의 아들)이 저자(어머니의 아들)에게 저지른 성폭력은 명백히 저자에게 수치를 주어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알려주려는 수단이다. 그런데 왜 그런 행위를 꼭 레슬링이라고 칭한담.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는지는 몰라도 능글맞은 게 진짜 아저씨같다. 이 형도 누군가에게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목격했거나.

형의 괴롭힘이 교묘하고 군인과 닮았다는 점도 역시 형이 누군가에게 배운 게 아닌가 생각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일하는 곳의 에피소드 하나가 기억난다. 높으신 분이 골프도 칠겸 겸사겸사 직장에도 들르신다 해서 사무실의 모두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고 상사들은 똥군기를 잡고 있었으며 높으신 분에게 한소리를 듣지도 못할 만큼의 말단직에 있는 나는 프린트를 출력 중이었다. 회의가 끝날 즈음 어떤 젊은이의 목소리가 들렸었다. "근데 꼭 여기 군대같지 않아요?" 상사들은 모두 거품을 물고 젊은이에게 사정없이 동물들을 들이대며 비유하고 있었다. 그 후,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노조들에 의해 상사 포함 직원들의 폭력이 누출되었고 회사는 그래도 제법 일할만한 곳이 되었다. 여전히 군대같기는 하지만.

과연 어머니는 오로지 저자에게 아버지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섣불리 두번째 결혼을 했을까? 나는 저자의 단호한 추측에 반발하고 싶어진다. 첫번째 결혼도 그녀의 선택이고 두번째 결혼도 그녀의 선택이다. 물론 어머니가 남자보는 눈이 없는 걸 저자가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머니로 인해 가족을 선택할 힘이 없는 아이는 두 번이나 아버지를 이별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모성성에 대해 굉장히 보수적인 시각을 갖게 된 게 반드시 저자 탓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자해와 자살 시도를 선택하여 어머니에게 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어쩌면 서로 아주 중요한 일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게 두 모자의 유전적인 성격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이들의 태도가 좋지는 못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짧은 치마를 입지 않았으나, 결정적으로 폭력에 대한 대처가 어른이 되서도 부족했던 듯하다.

 

폭력에 대한 공감은 사실 지역, 종교, 성별이 따로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어질 뿐이다. 물론 둘 다 크던 작던 어느 정도의 억울함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건 사실이다. 피해자를 선택하는 건 정의의 길이기 때문에(그래서 의도는 아니나 일부러 페미니즘을 사칭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뭐, 결과가 좋으면 좋은걸수도 있지만.) 가해자를 선택하는 경우는 많지 않을거라고 대부분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가해자가 권력자라 생각하기 때문에 가해자 편을 드는 사람도 꽤 있다. 심지어 출판사에서 그런 책이 나오기도 한다. 여러분은 어느 쪽일까.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소위 연애 경험담인 '썰'은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성별에 따라서 이야기가 다른 건 씁쓸하다. 남성들은 했는지 안 했는지가 주로 관심소재라면, 여성은 '처녀'임을 유달리 강조하거나 아예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나도 상당히 꼰대라서 썰이 그렇게 널리 공개적으로 이야기할만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확실히 아직도 정절에 대한 편견은 존재한다. 남친과 남사친을 구별하는 것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유무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스킨십의 유무를 따지는 건 굉장히 좁은 시각이라고 본다.

그러고보면 이 남자는 상당히 희귀한 케이스라 할 수 있겠다. 형에게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에 대해선 공부할 생각이 하나도 없었고, 평상시에는 대중문학들만 보아왔기 때문에 성차별 문화에 물든 케이스. 그래서 포르노를 굉장히 싫어하고 썰에 대해선 분노를 느끼지만, 한편으로 '대중적인' 가족의 이미지를 몹시 그리워하는 게 이 저자의 상태이다. 다시 말해 아버지가 이렇지 않았더라면, 형이 저렇지 않았더라면 이상적인 가족이 형성되었을 거란 미련에 다소 사로잡혀있는 편. 그러나 말 그대로 저자가 이성적인 가족 안에서 살았더라면 이렇게나 성폭력 피해자에게 감정이입하지 않았을 거란 딜레마도 존재한다.

그리고 난 남성 페미니스트들을 공격하는 레베카 솔닛이 참 맘에 안 든다. 일단 남자들의 세계를 버리고 이쪽으로 넘어온 이유가 각자 있을텐데 그들이 받았을 분노나 상처를 같이 이야기하고 나누지 않겠다는 건 자신이 마치 페미니즘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실질적으로 나는 (올바른) 남성학의 발전과 남성의 전화의 번성에 해결책이 있을거라 본다.

나는 성폭력 관련 책을 사면서 돈을 소비하고 있다. 글쓴이는 독자들의 생각까지 통제하려 드는데, 그건 정의의 유무를 떠나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남이사 책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던 딸을 치던 무슨 상관이냐. 책은 이미 저자의 손을 떠났다. 추가로 한 마디 하겠는데, 강남에서 책의 저자를 불러서 유료 독서모임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뭐지? 책을 읽으면서도 혼자서 그 의미를 생각할 줄도 모를 정도로 멍청하냐? 뭐 돈 버리는 건 개인의 자유이지만서도. 그리고 저자 니는 글을 띄어쓰기도 문법도 무시한 채 개판으로 써놓고 감히 공지영과 한공주를 욕해? 그럼 너도 좀 제대로 써서 그 이상으로 돈 벌어봐라. 팔리게 써야 사주지.

 

졸린 눈을 애써 비비고 학교에 가면, 수많은 비웃음과 조롱, 그리고 괴롭힘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죠. (...) 그때 퇴마록을 처음 읽었었죠. 드래곤 라자도, 세월의 돌도, 더 로그와 월야환담도. (...) 그 시절, 저는 메모장에 적어 가슴에 품어놓을 정도로 새기고 싶었던 시가 한 편 있었어요. 소설 '룬의 아이들 윈터러'의 첫 장에 수록된 시였었죠.

'겨울을 지새는 자여.
그것은 아주 길고 긴,
결코 끝나지 않는 겨울일지도 모른다.

서리와 눈보라를 이기고
바람과 눈물을 견뎌
마침내 찾아올 그 봄은

네 시체 위에 따뜻한 햇살이 되어 내릴지 모른다.

그러니 마음을 푸른 칼날처럼 세워
천년의 겨울을 견딜 수 있도록 대비하라.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요. 참 우스운 이야기지만요. 저는... 살고 싶었어요. (...) 그치만, 만약 공부를 잘해서 대학을 가면, 그것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게 된다면. 소위 말하는 인서울을 하게 된다면... 저는 이곳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명작이다. 그 외에 설명은 생략한다.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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