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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Math

랩 걸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남자에게 구속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부터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일했다. 시골 마을 결혼식을 거쳐 아이들을 낳고, 내 꿈을 펼치지 못한 실망감을 아이들에게 쏟아내면서 아이들의 미움을 받는 운명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그런 길을 걷는 대신 나는 진정한 성인이 되기 위한 길고도 외로운 여정을 거치기로 결심했다.

 

 

 

미안하지만 난 처음에는 이 책이 소설인 줄 알았다. 하와처럼 아담의 갈비뼈에서 태어나거나, 프랑켄슈타인처럼 남성의 실험에 의해 세상에 태어난 피조물이 실험실에서 감금되어 살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가 내 생각에 몇 개의 오류가 있다는 걸 알았다.

 

 첫째, 이 책은 비소설이다. 하지만 저자가 워낙에 위트가 넘치고 관심이 있는 일은 몸이 작살나서도 하려고 하는 열성적인 미국인의 전형적 기질을 가진지라 코믹한 소설같은 느낌을 주기는 한다. 둘째, 파워퍼프걸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녀들이 과학자 복장을 하고 식물을 관찰하겠다고 이리저리 통통 뛰어다니는 장면이 뇌리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캐릭터를 잘 그려서 스티커로 만들어 굿즈로 내놓으면 성공할 거 같았다. 눈길을 달리다 차가 뒤집어지는 장면까지도 그럭저럭 귀엽게 그려놓으면 잘 될 듯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다면 후반부에 유방에 난 종양을 빼기 위해 칼을 쓸지 드릴을 쓸지 조수와 토론하는 장면은 빼도 좋을 것 같았다. 너무 아이마이미같잖아?

 

 

 

 아무튼 어떤 사람이 알마출판사의 다른 책을 보고 왜 이런 책을 알마출판사에서 출판했는지 모르겠다는 애매한 칭찬을 하던데 그게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일단 빌어먹을 필기체를 예쁘게 하려는 건 알겠지만 단순한 이야기인데도 너무 읽기 힘들다. (그래서 번역의 틀린 부분이 너무 잘 보여 이중으로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리고 표지가 너무나 얌전하다. 밑에 프로작이라도 살짝 그려놓아야 되는 거 아닌가...

 

 

 

초반부에는 지루했지만 중후반부에 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닌가 싶지만 과하게 빌과 주인공이 썸타는 듯한 이야기로 진행되면서 재미가 점점 급증한다. 이들의 캐미가 어떻게 끝나는지는 직접 책을 보면서 확인하시길. 지지하는 커플이 감정을 교류하는 순간은 볼 때마다 행복하다. 로맨스소설의 묘미.

 

 어느 분야에 있건,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가 그 중요도에 비해 사회적으로 지지와 후원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반대로 타 분야에 대해선 역으로 현황을 이해하기도 하는 듯....;; 일단 저자가 식물학자인걸 감안할 땐 수긍이 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나라도 자연과 생태라는 훌륭한 생태잡지가 있었는데 부도나서 망했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페이스북에다가 책의 인상깊은 구절을 쓰는데 이번엔 일부러 그녀가 겪는 성추행에 대해서만 썼다. 친구 중 남자분들이 대다수라서 여성 과학자의 스펙타클한 행로에 충격과 공포를 받은 듯하다. 빌이 긴 머리 때문에 자주 곤란한 상황(...)을 당할 뻔했다는 에피소드에 남자들이 주로 반응을 보였다. 가수 김경호씨도 그 특유의 긴생머리 때문에 지하철 성추행을 간혹 당했다나? 여성으로 사회생활 하는 게 이런 거라니 상상도 못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나도 일단 웹에다 이런 이야기 지껄이고 나서 어디 가서 실물을 보이면(여자랍니다?) 다들 깜짝 놀랍니다. 그 다음엔 작업들어가는 인물들이 한 90%죠.

 이 책에선 결국 여성 과학자가 결혼을 한다. 그게 좀 아쉽지만 아무튼 아이가 없거나 결혼 안 한 여성을 결여된 존재로 여기는 건 부당하다고 이 책은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출산과 결혼은 여성의 행복이다.'라는 말은 할아버지 할머니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밥을 먹으면서도 화장실에 가서 볼일 보면서도 자면서도 듣는 말이다. 심지어 돈이 없어도 애만 낳으면 상관없지 않냐는 말도 듣는데 제발 여성 인생의 코스에서 그런 말들 좀 빠졌으면 한다. 결혼해도 일하느라 살 뺄 시간 없어서 추하다고 욕할 거면서.

 

 

 

나무도 자신의 자식에게 자신이 쓰다가 넘친 물을 자식이 사용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게다가 유년기의 혹독한 날씨를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가지를 꺾는 등의 상처를 주면 호르몬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사람도 감정을 느끼지만 아무래도 그건 주님이 주신 보이지 않는 영혼의 작용보다는 호르몬의 작용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식에 대한 배려던 지식이던 사랑이던 어쨌던 무언가가 있고 기억까지 할 수 있다면, 나무는 인간을 사랑할 수도 있고 증오할 수도 있고 왜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억은 충분히 왜곡될 수 있다.
 내가 사랑했다고 기억했던 게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게 우정이 아닐 수도 있다.
 먼 훗날 인간이 나무를 잃어버릴 수도 있고 나무가 인간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어쨌던 인간이 문명을 택한다면 자연을 잃고 나무가 자연보존을 택한다면 인간을 잃을 수 있는 것이다. 둘 중 하나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 때 (나는 그게 인간이 아니라 나무일거라 보는데) 마지막에 남는 건 희망 말고도 더 있다. 기억이다.

 

1951년 대학은 남성들, 주로 돈이 있는 남성들, 적어도 어느 가정의 베이비시터가 아닌 다른 돈벌이가 있는 남성들을 위한 곳이었다. (...) 학교 기술 시간에 오빠들은 벽에 걸거나 천장에 매달 정도로 커다랗고 강력한 도구들을 사용했다. 칼 세이건이나 미스터 스팍, 닥터 후, 프로페서 등을 보면서도 배경으로 등장하는 간호사 채플이나 매리 앤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미스터 스팍과 간호사 채플은 드라마 스타트렉, 프로페서와 매리 앤은 시트콤 길리건의 섬에 나오는 등장인물).

 

 머리를 자르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물리적 친밀감은 생각만 해도 빌을 겁나게 만들어서, 내가 캘리포니아에서 그를 만났을 때부터 빌은 늘 길고 윤이 나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가수 겸 배우였던 셰어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뒤에서 보고 그를 여자로 착각하는 경우가 흔해서, 지나가는 남자들은 종종 흠모하는 눈길을 보내다가 마침내 앞에서 덥수룩한 턱수염과 남자다운 턱을 본 후에 놀라서 당황스럽고 화난 표정으로 지나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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